초등학교 3학년 유정이 엄마는 얼마 전 창작동화 전집을 새로 들여다 놓았습니다. 그런데 유정이는 수십 권의 책 중에서 유독 한 권의 책만 반복해서 읽고 있습니다. 유정이 엄마는 답답한 마음에 다른 책들도 좀 보라고 말하지만 유정이의 반응은 시큰둥합니다.
4학년 성환이는 과학책을 상당히 좋아합니다. 창작동화에 별 관심이 없습니다. 성환이는 늘 이런 식입니다. 관심분야가 생기면 상당히 오랜 시간을 그것만 생각합니다. 편독은 편식과 마찬가지로 좋지 않은 습관이라는 생각에 성환이 엄마는 마음이 불안합니다.
학부모 대상 강연을 마치고 질문을 받으면 질문들이 대개 비슷합니다. 봤던 책만 계속 본다, 독서가 특정 분야에 치우쳐있어 걱정이라는 질문 역시 빠지지 않습니다. 그럴 때 나는 아이들이 봤던 책을 보고 또 보는 까닭이 뭔지 되묻습니다. 이구동성으로 ‘재미있으니까요.’라고 대답합니다. 그럴 때 저는 또 되묻습니다. “여러분도 어제 읽었던 책이 재미있으면 오늘 또 보나요?” 모두 아니라고 대답합니다. 어른들은 아무리 재미있게 읽은 책이라도 어제 읽은 것을 오늘 다시 읽으려 하지 않습니다. 다시 읽으면 재미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우리 아이들은 재미있어서 다시 읽는다고 합니다. 왜 아이들은 다음날에도 계속 재미가 있고 어른들은 그렇지 않을까? 그 차이를 모르기 때문에 봤던 책을 반복하여 읽는 아이를 바라보는 엄마의 시선이 불안한 것입니다.
어제 읽은 책이 아닌 10년 전에 읽었던 <어린왕자>를 지금 다시 읽으면 어떨까요? 새롭습니다. 분명히 내용은 그대로인데 느낌이 다릅니다. 예전에 봤던 그림, 예전과 다르지 않은 글자를 봤지만 내 마음에 전해지는 감동이 다릅니다. 같은 글이 달리 읽히는 것은 그 사이 나의 ‘스키마(배경지식)’가 달라졌기 때문입니다. ‘경험’이 달라졌기 때문입니다.
독해는 단순히 문장의 뜻을 사실적으로 이해하는 것만이 아닙니다. 문장을 머리에서 기계적으로 번역하는 과정이 아닙니다. 문장이 내 몸속에서 화학적 변화가 일어나는 복합적인 작동입니다. 독해력을 어느 정도 갖춘 어른들은 한 번 읽은 책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다시 읽어봐도 똑같을 거라 생각하여 다시 읽지 않습니다.
이유가 하나 더 있습니다. 어른의 눈은 차이보다 유사성을 잘 봅니다. 무언가를 새롭게 접해도 이미 접했던 것들과의 유사성이 크게 느껴져 새롭지 않게 다가옵니다. 새롭지 않으면 재미가 없습니다. 나이가 들면서 기억력이 떨어지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새롭지 않으면 진부하고, 진부하면 기억하기 어렵습니다.
반면 아이들은 재미있게 읽은 책을 다음날 다시 읽습니다. 어제도 재미있었고 오늘 또 재미있습니다. 늘 새롭습니다. 한 번 읽은 책은 최소한 몇 년은 지나서 다시 읽어야 예전과 다른 느낌을 받는 어른과는 달리 아이들은 매일 매일 새롭습니다. 읽을 때마다 새로운 느낌으로 다가옵니다. 아이들은 어른만큼 유사성에 집중하지 않습니다. 유사성을 배워나가는 과정일 뿐 머릿속이 온통 이미 해본 것투성이인 어른과는 많이 다릅니다. 여전히 차이에 민감할 때입니다. 미세한 차이를 계속 느끼는 중입니다. 이럴 때일수록 반복하여 책 읽기를 오히려 장려해야 합니다. “정말 재밌는 책인가 보구나.”라며 아이의 마음을 읽어주며 아이가 그 책에 더 빠져들게 만드는 게 좋습니다. 그럴 때 그 책이 온전히 아이에게 녹아들게 됩니다.
그러나 많은 부모들이 이렇게 하지 않습니다. “그 책 또 보니? 만날 그 책만 보니? 다른 책 읽으면 안 되겠니?”라며 다른 책 읽기를 유도합니다. 봤던 책을 또 보는 것이 독해력 향상에 도움이 안 되고, 무엇보다 지식을 쌓는 데 큰 도움이 안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시간이 아깝다는 생각을 많이 합니다. 그러나 이런 아이들의 행동은 교정의 대상이 아니라 오히려 칭찬의 대상입니다. 많이 읽고 경험하는 것도 물론 중요하지만 어떤 대상에 깊이 빠져 심취하는 것 역시 그것 이상으로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수많은 얕은 지식보다 중요한 것은 단 하나라도 제대로 쓸 수 있는, 활용 가능한 지식입니다.
완전히 내 것이 되지 않은 지식은 인터넷에 떠도는 정보와 다를 바 없습니다. 내 PC에 아무리 많은 정보가 담겨 있어도 필요할 때 바로 꺼내 쓸 수 있는 능력이 안 되면 죽은 지식입니다. 반복하여 읽는 까닭은 아직 새로움이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그 지식이 여전히 흥미롭거나, 그 내용이 여전히 감동적이기 때문입니다.
아이가 매일 같이 책을 통해 떨림을 경험하고 있는데 그것을 애써 막을 이유가 없습니다. 아니, 그래서는 안 됩니다. 어떤 책은 가볍게 스치듯 지나가지만 또 어떤 책은 가슴 깊은 곳에 크게 자리 잡기도 합니다. 유정이와 성환이가 지금 읽고 있는 책이 그러한 책일 것입니다. 엄마가 보기에는 한두 번만 봐도 될 시시한 것일지 몰라도 아이는 지금 진심으로 느끼고 즐기고 있는 중입니다.
만화책도 참고 계속 ~~ 기다려야 할까요?^^
이 단계가 다 채워져야 다음 단계로 들어 간다고 하더군요.
특별히 관심있어하는 부분이 있다면 관심분야에 대한 더 많은 책을 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좋은 습관이라는 말씀에 기분이 좋아지네요~
만화책은 아이들의 로망이 아닐까요^^ 우리도 재밌잖아요~ㅋㅋ
저의 눈과 다르게 볼 줄 아는 아이가 더 대견하고 기특하게 느껴지기도 하더라구요.
다독도 좋지만 한 권의 책을 깊이 좋아하는 아이를 인정하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되네요^^